청년으로 국제개발협력 살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i-


들어가며

이 글을 쓰기 위해 평범한 무역회사에서 시작해 국제개발협력분야 연구 기관의 현장사업 담당자가 되기까지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3년을 다닌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직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주였다. 일순간 영업팀장에서 인턴이 됐다. 무엇보다 현장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현장을 알고 싶었다. 현장에 가면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을 보다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있어선 안될 일들이 무언지 구분하고 대안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다행스럽게도 잘못된 기대와 전제는 머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업무에 임하는 시간이 늘수록 해갈할 수 없는 궁금증이 커지며 혼란에 빠졌다. 하나, 사업 수요를 통해 확인한 현장의 필요는 과연 ‘진짜 필요’일까? 둘, 현장에 대한 우리의 응답, 즉 사업의 실행과 연구결과가 정말 그 필요에 답할 수 있을까? 셋, 두 질문에 대한 정답이 과연 있을까? 질문 리스트의 영순위 혹은 마지막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현장과 대안, 그것들을 포함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현장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용론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현장은 무엇이고, 나는 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가에 대해 고민하는 미숙한 청년의 이야기로 너그러이 봐주길 미리 청한다. 

답답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나의 고충은 이것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한편에 두고, 매일 매일 그와 관련된 판단을 내리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또 이를 위한 일을 쉼 없이 해야 하는 것. 내가 알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아는 일의 일부를 따라가야 하는 것. 몰라서 생기는 질문이라 생각했기에 더 절실히 알고자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책상에 그득히 쌓인 일들에 충실하지 못하며 뜬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이상적인 질문들에 답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헌데 그럴수록 해야 된다 생각했던 일을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많은 물음표들을 걷어내니 손에 남는 질문은 한 가지였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돌이켜보니 지난 3년은 내가 가장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온 먼 길이었다. 


사람 중심 개발사업에 관한 기대에 대하여

요즘은 뜸하나, 이 전엔 이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 지인들이 토로하는 고민이 있었다. 국내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해외까지 가냐는 질문에 뭐라 대꾸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질문에 답할 때 고민해본 적이 없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훼손하고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일을 감시하며 대안을 찾기 위해 자신의 역할에 임하는 것에 해외나 국내의 구분은 무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문제가 발단된 지역 중 어느 곳을 택하든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에 참여하는 태도와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나는 도리어 질문자에게 묻고 싶었다. 해외나 국내가 뭐가 다르냐, 문제의 본질은 같지 않냐고. 그리고 해외 지역주민과 나, 우리는 다르지 않기에 그들을 동등하게 마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굳게 서 있던 내 확신이, 다시 말해 내 아집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그들과 우리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이다. 

물론 내가 ‘우리’라고 해외 지역주민들과 나를 동일시한 것은 서로의 지위나 위치, 상황을 뛰어넘는 의미였다. 그러나 상위의 의미로 가기 이전에 물리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역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를 모르며 그들의 방식대로 사고하지 않는다. 나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이 아니라 들렀다 떠나는 손님이기에 그 지역의 문제가 내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언어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가시화되지 않는 그들 속의 역학관계 역시 알 수 없다. 나의 개입이 무엇을 자초할지 확신할 수 없다. 단기적 도움이 과연 장기적 기회가 될 것인가? 나도 그들과 같은 주민이 되지 않고서, 그래서 그 지역이 내 삶의 터전이 되지 않고서 주민이, 사람이 중심이 되는 개발사업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지역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지역 주민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흑백논리의 문제라기 보다, 내가 원하는 바와 나의 역할 사이 간극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만, 사람 중심 개발이 대안이다 외쳤던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나는 속으로 계속 묻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대안이라 말하는 것을 우리 삶을 빌어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지금 내가 사는 현장에 답하기: 질문만 하지 말고, 질문을 살자

지역주민과 지원이 필요한 당사자들이 중심에 선 사업을 본 경험도 물론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놀라웠던 현장에는 모두 장기간 그곳에 체류하며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익힌, 영락없이 지역 주민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때로 체류한 양적 시간과 비례하지 않은 적도 많았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십 년 가까이 일하던 선배가 정든 자리를 떠나며 남긴 말이 있었다. ‘나는 굳이 국제개발협력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열과 성으로 현장중심의 사업을 해오던 선배의 말이라 나는 더욱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찌 내가 쌓은 공에 미련이 남지 않는단 말인가? 국제개발협력으로 시작한 경력과 경험을 한 순간 바꾸고 뒤집는 것이 가능한가? 당시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 말을 나는 3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깊이 이해했다. 이해가 되자 고민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어디일까. 내가 중요시 하는 가치에 대해 말로 거듭하고, 염두에 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질문을 살아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최근 해외 현장이 아니라 가까운 지역이웃의 활동에 동참하며 다시 한번 보았다.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머리로 먼저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나의, 우리의 모습을. 그간 알아온 것을 모두 깨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아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공식으로부터 스스로의 자유를 허하고 항상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졌다.


‘바보’가 되고 싶다. 

누군가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소명을 찾기 위해 쓰여야 한다고. 자신 내면의 기쁨과 세상의 허기가 만난 것이 곧 자신의 소명이며, 이 시대엔 그것을 찾고 행하기 위한 노력이 곧 용기라는 것이다. 용기를 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옛일이라 했다. 지나치게 함축적인 말이지만 나는 ‘바보’의 삶을 살고 싶어졌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할 만큼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내 개인의 경험은 일천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쌓인 집단의 지식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관련하여 나는, 내 개인에게 당부하고픈 바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우리는 이 지식들을 더욱 사실에 가깝게 확인하고, 현장의 사람들에게 묻고, 함께 시행착오를 나누며 쌓아가야겠으나,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 갇히지 말고 이것을 부정하고 다시 묻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또한 우리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 더 이상 묶여 있지 않길 바란다. 이미 정해진 기준과 관례들이 어디에 근거해 이루어져 있으며, 일련의 관행들이 과연 의도한 목적에 기여하고 있는지 따져 묻길 바란다. 잘못된 것들에 대해 ‘세상이 다 그렇지’ 라며 너무 일찍 단념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옳다, 바르다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동의하지 않길 바란다. 그 답을 직접 찾아 나서고, ‘모두가 맞다’ 할 때에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내가 아는 것이 옳다는 아집은 먼저 깨부수길 바란다.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을 찾고, 세상의 허기(虛飢)에 답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靑年)이기 때문에. 

i)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저, 정현종 역, 물병자리, 2002



기사 입력 일자: 2014-10-15




작성: 장해영, ODA Watch 청년활동가 7기 / redi20111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