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흔들리는 한 중년활동가의 자기고백-


본부에서의 5년

한국의 작은 NGO에서 일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내적, 외적 질문에 마주하며 흔들리는 과정이다. “내가 하는 일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가”, “나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있는가”, “비록 대안을 주장하지만 나 또한 사회 전반의 기준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넌 그 봉사활동을 언제까지 할거냐”, “네 나이에 월급을 그리 받고 살 수 있느냐”, “그 길만이 길이 아닌데 왜 바보같이 고집하느냐“ 등등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다가도 지칠 때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질문들.

개발협력은 나에겐 새로운 분야였다. 서른이 될 때까지 학생이었고, 이 분야에 들어오기 전에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을 나갔다 돌아오는 입양인들의 사후지원 활동을 5년정도 했다. 그러다 좀더 시야를 넓혀 여성과 아동의 인권을 국제적인 맥락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인터넷에 채용공고를 낸 단체가 있어서 지원했다. 국제개발협력이란 단어의 뜻도, 어떤 분야인지도 사실은 잘 몰랐다. ‘국제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 정도? 일을 시작하고 나서 주변의 이야기를 주워들어가며 국제개발협력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MDG라는게 있는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이 글을 떠맡게 된 것도 그때 내게 이 분야에 대하여 알려준 OWL에 진 빚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회생활을 늦게 시작해 나이가 많았고, 작은 조직이었기에 승진이 빨랐다. 금새 팀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후배들을 이끌고 다독여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조직 운영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종교 기반이 아니고, 기업재단의 지원이 없고, 개인후원회원이 적은 단체다 보니 직원들 월급을 제때 주기 위해서 단기봉사단과 외부 프로젝트사업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후원기관들의 말도 안 되는 갑질도 견뎌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후배들과 현장활동가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지금은 이 일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현장과 주민이 중요하다고는 말하면서도 책상 앞에서 데이터만 보며 수많은 프로포절을 썼고, 그 계획서를 현장 활동가들에게 던졌다. 현장에서는 당연히 계획서와 현실의 차이에 괴로워했고 그 활동가들의 어려움을 품어 줄 만한 여유는 내게 없었다. 이제 막 이 일을 시작한 현장 활동가들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여 충분한 역량을 쌓을 기회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정산서류에 뭐가 부족하다는 이야기, 언제까지 무슨 자료를 보내라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었다.

5년간의 본부 생활 후 느낀 것은 내가 마치 ‘고문기술자’와 같은 뉘앙스의 “프로포절, 보고서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선정될 수 있는 매끄러운 논리의 로그프레임을 그려낼 것인가, 요즘 공모에서 먹히는 트렌디한 아이템과 단어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운영비와 인건비를 자연스레 예산안에 녹여 넣을 것인가, 정산과 성과 계산에 공이 덜 드는 수월한 사업은 무엇인가, 사업의 실패를 그리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게 기술하는 방법, 무조건 성공한 사업인 것처럼 보이게 지표를 만드는 방법, 예술적으로 영수증 액수를 맞추는 방법 등등... 개발협력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들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숫자와 영수증만 모니터 위에 침침하게 보였다. 개발협력 5년차 활동가에게 남은 전문성이란 이런 것뿐인가라는 회의가 들었다. 

업계를 떠날까 고민하던 중 현장에 나가라고 집요하게 권유한 주위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지던 짐을 후배들에게 던지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컸고, 워낙 본부에서도 중간관리자들이 부족하던 상황이라 한해라도 더 버텨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컸다. 그러나 5년간 한 일을 막상 떠나려니 드는 아쉬움이었을지, 아니면 이 세계의  절반을 알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이 중도포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 당시 비어있던 몽골 지부장자리로 내보내달라고 했다. 안 보내주면 사표를 낸다는 자세로, 그런 식으로 현장에 나오게 되었다. 개발협력에 대한 회의로 가득하여, 난 후배를 안 만들테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현장에서의 2년  

현장에 오기 전 한 달 정도 책도 많이 읽고, 자료도 많이 봤다. 주로 몽골과 도시빈곤과 주민운동에 대한 글들이었다. 머릿속에 나의 현장활동에 대하여 열심히 그려보았다. 정말 주민들과 어울려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속에서 리더를 세우고, 그 사람들의 힘으로 지역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일하고 있는 단체 사무실은 게르촌이라고 하는 도시 빈민지역 한가운데 있다. 게르촌은 살기 어려워 유목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이 처음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동네이다. 초원에 있어야 할 유목민의 집인 게르들이 도시 외곽에 자리잡았다 하여 게르촌이라 불린다. 단체가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나는 아마도 시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모니터만 바라보며 살았을지 모른다. 행사 때나 모니터링 방문 때만 잠깐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사업장은 변두리에 딱 하나밖에 없고 규모가 작아서, 내가 바라던 것과 같이 매일 주민들을 만나고,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누가 어제 부부싸움을 했는지, 애가 학교에서 몇 등을 했는지, 어느 집 누가 아픈지를 알 수 있는, 내가 그리던 현장활동과 가까운 천혜의 환경이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그러한 현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나의 활동이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나는 빈곤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다. 아니 알기에는 너무 많이 배웠고 너무 부유하고 너무 힘이 셌다. 빈곤이 단지 물자의 부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읽고 써 왔지만, 실제 우리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정말 단순하지 않은 문제임을 깨닫는다. 빈곤은 병을 키워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는 문제이고, 긴 겨울 추위에 떨어야 하는 문제이고, 배가 고프고 영양이 부족한 문제이고, 키가 작고 냄새가 나고 옷차림이 남루한 문제이고, 중독과 범죄에 가까워지는 문제이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되는 문제이고, 세상을 헤쳐나갈 힘이 약해 나쁜 남자에게 맞고 이용당하는 문제이고, 교육을 받고 좋은 일자리를 얻기 힘든 문제이고, 여가를 누릴 기회와 방법이 부족한 문제이며, 가족을 사랑하는 표현의 박탈에 대한 문제이고, 이유 없이 무시당하는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자존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개발협력 활동가로 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빈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집-사무실-집으로 이어지는 그 생활 반경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여유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내 직업과 생활은 그렇게 멀리 있었다. 빈곤은 내가 써대는 후원요청 글, 사업제안서, TV 속에만 있었다. 왜 가난한 동네에서 그리 많은 싸움이 일어나는지, 그리 사람이 풀썩 세상을 떠나는지, 사람들은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민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빈곤을 해소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개발협력활동이라고 봉사단 교육, 대학 강의실에서 떠들고 다녔지만, 빈곤을 가까이에서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후 스스로 내 모습이 매우 부끄러웠다. 머리만 진보적인, 입만 살아있는,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사는.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몽골을 몰랐다. 몽골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을 현지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2년정도 걸린 것 같다.  춥고 변덕스런 계절과 기후에 적응하는 데만 1년이 꼬박 걸렸다. 한번 겨울을 나보니 몽골사람들이 왜 여름에 한 달씩 쉬는지, 왜 고기를 그리 많이 먹는지 겨우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음식을 왜 그리 싫어하는지도, 손이 차가운 사람을 왜 나쁜 사람이라 말하는지도. 그리고 왜 모든 일을 일단 ‘된다’고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워낙 급격히 변하는 날씨와 환경속에 살다보니 지구력보다는 빠른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2년차가 되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축적되자, 적은 인구로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켜가고 있기에 문화적 자부심이 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사회주의국가가 되었고, 시장개방을 하였으며, 무혈 민주주의를 이룬 과정을 알고 나서야 왜 그리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부심이 높은지 알았다. 시장경제로의 체제 전환 과정에서 아픔과 충격이 컸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몽골 말은 아직도 어린이 수준이다. 2년쯤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조잘조잘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지고, 아직도 손짓발짓을 사용하며 지내고 있다. 그나마 이젠 아주머니들이 아는 애라고 먼저 말을 걸어준다는 게 달라졌을 뿐. 

마지막으로, 주민을 세우고 그들의 힘을 모아 그들의 손으로 지역을 바꾸는 것은 거대 원칙이고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작 내 임기 몇 년 동안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고 그저 동네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저 사람이 내가 하는 일의 중심임을 잊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깨달았다. 부임 1년차에 의욕이 앞서 만들었던 지역 내 어머니 모임은 잘나가는 듯 하다 일년도 채 못 채우고 산산이 흩어졌다. 교훈은 얻었지만 마음은 쓰렸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을 보게 된 적도 있었다. 지역 내 절실한 유치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르 유치원을 설립하려는데, 동네에 마땅한 땅이 없었다. 거대한 폐허가 있는 땅을 동 사무소에서 줬는데 철거할 예산이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는데 2주만에 연락이 와 가 보니 그 거대하던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삽질을 하여 트럭 수십 대 분량의 폐 건물을 치워냈던 것이다. 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안하니 되는구나라는 동양철학책 어딘가에서 본듯한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기술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구나. 프로젝트 계획서의 틀 안에 묶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삶과 철학의 문제였다. 큰 깨달음이었고, 기쁘고도 난감했다. 

활동 3년차가 되면서, 일은 배수가 아니라 제곱으로 느는 느낌이 든다.  협력기관도 늘어나고,사업 기회도 열리고,  이제 몽골어 회의도 통역 없이 거의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파견 전에 읽었던 책 구절들과 포부들은 아직도 요원한 느낌이다. 이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정도... 이제 동네사람 취급 받고, 이제 동네 문제가 뭔지 깊이 있게 알겠고, 이제서야 이해관계자들이 누구인지 알겠는데... 주민들을 중심에 두고, 그 사람들을 세우는 단계까지 다다르려면 또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도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빈곤이라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를 몽골의 수도 변두리의 한 동네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버거운 과제이다.

그러나 본부에서 느끼던 회의는 많이 사라졌다. 이곳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가 한국에서 만나던 사람들에 비해 매우 긍정적이고 따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이곳에서는 출근해야 할 이유가 매일매일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기 때문인 것도 같다. 아이들 머릿니도 잡아줘야 하고, 동네 술꾼 아버님 오늘도 건강히 길에 나와 계시나 봐야하고, 길에 노는 아이들 수업 땡땡이 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휴가나 외근으로 센터에 한동안 나오지 못하면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하고 보고 싶다. 결국 아직까지 동네사람들에게 받고만 있는 듯하다. 이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하나.


개발협력이 도대체 뭘까?

요즘 들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과연 개발협력인가? 그것은 종교나 사회복지의 영역이 아닐까?  남의 돈으로 제한된 기간 안에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개발협력활동가로서 예산과 인력을 끊임없이 투입해야 하는 사업을, 변화가 매우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려면 어느 정도는 기초역량이 있는 사람들과 일해야 하지 않는가, 어느 정도는 배우고, 어느 정도는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지는 않을까. 궁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지부장인 내가 우리 동네 사람들보단 정치인 한 명을 더 만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전체 국제개발활동 판에서 NGO 활동가의 역할은 뭘까.  그저 이 동네에 살면서 우리동네 이런 사람 있어요, 저런 사람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라고 크게 떠드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기관을,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철없지 않은가.

현장에서도 외부 프로젝트 사업을 하고 있다. 본부와 비교하면 그래도 사업인력 인건비를 사업비에서 뺄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후원처들이 선호하지 않는 ‘돈이 계속 들어가는’ 혹은 ‘가시적 성과가 없는’ 사업들은 항상 고전하고 있다. 특히 마을주민들과 잘 지내는 것, 마을주민들의 모임 만들기, 사례관리 아동 지원 등은 지표 선정도 어렵고 프로젝트 기금으로 커버하기 어려운 비인기종목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업은 개발사업이 아닌가? 게르촌이 개발협력사업에 잘 맞지 않는 사이트라는 한 전문가의 평가도 들었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만큼 고립되지 않아서 그렇단다. 이렇게 최빈층 대상의 사업을 하면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조언도 꽤 들었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개발협력사업은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훈훈한 결말...을 쓰고 싶었으나

이제 비영리단체 13년차, 국제개발협력 8년차가 되었다. 국제개발협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사 때 느끼던 고민과 지부장이 된 지금의 고민의 내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단, 그 때는 단순히 비판만 하면 되었는데, 이젠 내가 저질러 놓은 많은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다르다. 흔들리며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어디서 읽은듯한 구절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리며 가는 길이 개발협력 활동가의 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저질러 놓은 것들을 반성하고 치우면서, 한해 한해 우리가 생각하고 구호처럼 외우고 배우는 것들에 대해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런 순진무구한 희망을 버릴 수 없어 아직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이리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쓰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몇 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몽골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동료 NGO 활동가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닿는 부분을 많이 발견하였고, 그 나눔 만으로 힘이 됨을 느꼈다. 이 글이 지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부끄러운 고백으로 가득 찬 긴 글을 읽어주신 OWL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온 마음으로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내 조직의 선배, 후배, 동료 분들이 이 글로 인해 혹시라도 마음 상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활동가 개인으로서 나의 한계에 대한 반성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여러 어려운 환경속에서 분투를 이어가고 있는 본부 활동가들에 기대어 살고 있는 현장활동가로서, 항상 가슴속 깊이 감사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길. 



 
기사 입력 일자 : 2015-07-29



작성: 최진경, 코피온 몽골 지부장 / planning@copion.or.kr